1920년대 다방의 모습
다방 '아네모네'의 마담으로 있는 영숙은 매일 이 다방을 찾아와서 한쪽 구석 자리에 앉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신청하는 학생이 기다려진다.
그 학생은 얼굴이 창백하고 언제나 우수에 젖어 있는 듯했다.
영숙이 그 학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보이(Boy)를 통해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한 장 틀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받은 뒤부터였다.
그 사각모를 쓴 학생은 말없이 신청한 곡을 듣고 갈 뿐, 한 마디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학생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한 끝에 그녀는 귀걸이를 달게 되었다. 그 학생은 미완성 교향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마담 영숙이 앉아 있는 쪽을 가끔씩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학생이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찾아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함께 왔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그 친구는 어느 교수 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이 병으로 죽게 되자 거의 미쳐 버린 것" 이라며 대신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들었던 것도 그 부인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으며,
또 그가 가끔씩 마담 쪽을 바라본 것도 마담이 앉아 있는 카운터 뒷벽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마담 영숙은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지고 고적해졌다.
그 뒤 다방 '아네모네'에서는 여느 때와 같이 미완성 교향곡이 아닌 재즈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담의 귀에는 자랑스러운 귀걸이도 보이지 않았다.
-주요한의 아네모네의 마담-
1930년대 다방의 성행
이상은 무려 네 번이나 다방을 열고 닫았던 문학가이다.
종로네거리의 신신 백화점 위에 있던 제비 다방, 인사동에 낸 쓰루(학을 뜻하는 일본말),
문 열기 2,3일 전에 허가 취소된 69다방, 명동의 무기(보리를 뜻하는 일본말) 다방이 그가 탄생시킨 것이다.
그가 처음 시작한 제비 다방은 동거하는 기생 금홍이와 함께 경영하던 서울의 명물이었다. 하지만 1935년 9월에 문을 닫고 만다. 왜냐하면 돈이 없어 차를 구비해 놓지 못했고 손님이 없어 장사가 되지 않아, 결국 다방의 월세가 밀린 까닭으로 집주인에게 쫓겨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인사동에 쓰루 다방을 냈지만 얼마 가지 못하였고, 또 네 번째의 무기 다방도 곧 간판을 내렸다. 한편 세 번째 시도한 69다방은 문을 열어보지도 못하는 비운을 맞았으니. 인사동에서 광교로 건너온 이상은 69다방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종로 경찰서의 허가를 받은 상태, 그래서 식스 나인이라 쓰고 69의 도안을 그린 간판을 걸어 두었다. 그런데 다방을 열기 2,3일전 종로 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가 보니 경찰은 다방 허가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슨 "풍기문란죄." 식스 나인이란 말은 아주 선정적이어서 당시 풍기문란죄에 걸리는 말이었지만, 경찰이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처음에 허가를 내주었다가 어느 시민의 항의를 받고 뒷북을 쳤던 것.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날짜만을 기다리는데, 이것을 보고 말 뜻을 아는 사람은 속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모르는 사람은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시민이 "이렇게 풍기 문란한 다방 이름을 어떻게 허가할 수 있느냐."는 항의를 듣고 뒤늦게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때 이상은 속으로 '이놈 들' 하고 비웃으며 경찰 골 린 일을 재미있어 했다는데..
그 뒤로는 종로 경찰서 관내에서 영업허가를 얻을 수 없게 되어 명동으로 진출,
그때 낸 다방이 무기이다
- 이상의 커피 편력-
1950년대 문인들의 다방
1951년 10월 하순 경향신문사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경향신문 기자였던 박인환도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박인환뿐만 아니라 여타 문인들도 피난민들 틈에 끼어 임시 수도 부산으로 몰려 들었다.
좁고 기다란 항구 도시, 그 음습한 피난의 공간에 수많은 유랑민들이 넘쳐 흘렀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생존 그 자체가 삶의 목표였기에 추위와 허기,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쓰러질 듯한 바라크 지붕 밑에서 꿀꿀이 죽으로 하루를 연명하면서도 예술인들은 그들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여 정신적 귀족으로 남고자 했다.
싸구려 비지 국을 안주 삼아 "낙동강" 소주를 마시더라도 줄리엣그레꼬의 샹송을 흥얼거리고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에 심취했다.
그야말로 예술인의 "밀다원 시대" 가 열렸던 것이다.
밀다원은 문인들이 주로 찾던 찻집이었다.
문인들은 자주 가는 찻집 별로 나뉘어져 밀다원파 (김동리,황순원,조연현, 김발봉)/ 금강다방파 (박인환, 김경린, 이봉래, 김규동) 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주로 밀다원파는 문총파 중심의 기성 문인들이고, 금강파는 신진시인들 특히 박인환 중심의 "후반기" 동인들의 집합소였다. 이렇게 찻집에 몰려들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며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곤 했던 것이다.
혼자 있으면 불안한 시절, 함께 모여야만 위안이 되는 그야말로 혈거 부족의 시대였다.
-김 동리의 밀다원 시대-
'커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두의 종류 (0) | 2010.04.13 |
---|---|
커피를 오해하지 마세요! (0) | 2010.04.13 |
다방 (0) | 2010.04.13 |
손탁호텔 & 다방의 시작 (0) | 2010.04.13 |
커피를 마시며 (0) | 2010.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