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온 것은 대략 1890년 전후로,
이는 에디오피아의 양치기 소년 칼디가 커피를 처음 발견한지 100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의 일이다.
당시는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이권 쟁탈전을 벌이던 때였으므로 외국의 상품들이 물밀듯 밀려 들어온 시기였다.
정식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은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지냈던 고종이라고 한다.
그 뒤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미인계 전략으로 한국 사교계에 침투한 손탁이란 여자가 공사관 앞에서
<정동구락부>를 경영하였는데,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다방으로 각종 다류와 양식을 선보인 곳이다.
한일합방 직후에는 명동에 긴샤텐(찻집을 뜻하는 일본어)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모두 일부 고위층에 한정된 사람들만이 드나들던 곳으로 보통사람들에게는 아직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19년에 이르게 되자, 오사카에서 이름을 날리던 카페 <미인좌>가 충무로 2가에 지점을 내고
그 옆에 <사롱 아리랑>이 개업을 해 경쟁을 했다.
다방이 대중화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이며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었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이었다가 다음에는 다실, 찻집으로 불리워졌다.
<명과>라는 다방은 초기에는 제과점으로 홍차나 커피를 함께 팔다가 차츰 커피 맛을 찾아 모여드는 손님 때문에 다방으로 변모하였다.
이 다방이 당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끌자 그 건넛집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두 다방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이고,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다방은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한 조각가 이순석이 조선 호텔 건너편에 문을 열었던 <낙랑팔러>가 최초였다.
이곳은 곧 문학가인 정인택, 이상, 박태원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회 사람들, 화가, 영화인 등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바로 이 <낙랑팔러>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하나 둘씩 생겨났는데,
당시 유명 인사들이 경영하던 다방을 들면
영화감독 이경손의 <카카류>,
정치가 이기붕의 <올림피아>,
문학가 이상의 <제베>, <쓰루>, <69>, <무기> 다방 등을 꼽을 수 있다.
손탁호텔
서울 시내의 낭만적인 산책로이자 문화의 거리인 정동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정동제일교회를 지나 이화여고 동문이 나온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주차장 한 모퉁이에 돌로 된 작은 표석이 놓여 있다. “손탁호텔터: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孫澤, Miss Sontag)이 호텔을 건립,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던 곳”이라는 내용이 그 안에 씌어 있다.
개화기에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이 대립하고 각축하던 역사의 한 폐이지가 담겨 있는 곳이 이곳 손탁호텔이었다. ‘손탁호텔’이라는 명칭은 1909년에 정식으로 사용된 것인데, 그 이전에는 ‘손탁양저(孃邸)’ 또는 ‘손탁빈관(賓館)’, ‘한성빈관(漢城賓館)’ 등으로 불렸다. 1909년 8월 3일, 프랑스인 호텔경영업자 보에르(J. Boher)가 이를 인수하여 ‘손탁호텔’로 신장개업하였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서울의 외교계에서는 손탁이 운영하던 빈관을 ‘손탁호텔(Sontag Hotel)’로 통용되고 있었다. 이 손탁호텔은 개화기 조선의 역사적 사건들이 긴밀하게 얽혀있다.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은 1885년 러시아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그녀는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의 독일인으로서 베베르의 처형이었다. 그녀가 처녀였는지 미망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용모가 아름답고 태도가 세련되었으며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난 여성이었음에 분명하다. 예술적 감각과 더불어 외국어에 능통했던 손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울 주재 서양 외교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사교계의 여왕이 되었다.
개화기에 조선정부는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근대적 외교조약을 체결한 후 궁중에서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일이 많아지자 외국어에 능통한 여성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손탁은 궁내부 소속의 관원이 되어 외국인접대를 맡게 되었다. 이후 손탁은 외국인을 위한 왕실 연회를 주관하면서 국내외 귀빈들에게 서양 요리를 대접했다. 손탁은 고종과 명성황후에게도 서양 요리를 제공했으며, 고종은 손탁의 커피도 즐겨 마시게 되었다.
손탁은 요리뿐만 아니라 왕궁 인테리어에도 재능을 보였다. 당시는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처소를 옮긴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인테리어를 손보는 일이 많았다. 손탁은 경복궁의 실내장식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주방과 침전까지도 서양식으로 바꾸는 일을 주도했다. 명성황후는 서양 열강의 소식을 재치 있게 전달하는 손탁을 총애했으며 자주 접견했다. 이에 손탁은 명성황후에게 각종 소식뿐만 아니라 서양의 역사와 제도, 음악과 미술에 대해 가르쳐주었으며 심지어 화장술까지도 관여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친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이 직접 조리하는 서양요리만을 안심하고 먹었을 정도로 손탁을 신임했다.
1895년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 29번지 소재 왕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 1,184평을 하사했다. 이는 청일전쟁의 과정에서 일본이 김홍집 친일정부를 구성하여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고종의 포석이었다. 친일정부가 수립되자 손탁은 곧바로 러시아공사관과 제휴하여 배일운동을 주도했다. 고종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배일운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던 것이다. 손탁은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한옥 저택의 실내 인테리어를 서양식으로 장식하여 서양 외교사절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당시에는 아직 서울에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손탁의 사저에 머무르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손탁의 배일운동이 성공하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종은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1898년 3월 16일자로 된 「양관하사증서」에서 고종은 “노고에 보답하는 뜻(以表其勞事)”을 각별히 표시한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호텔업무는 이때부서 시작된다. 손탁 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서울방문이 빈번해지자 방 5개로는 협소하게 되었고 이에 고종은 왕실재정으로 이를 확장해 주었다. 1902년 10월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이 준공되었다. 이 시기 손탁호텔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찐이 설계한 증축된 손탁호텔은 벽면 전체를 아케이드 처리한 전형적인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이다.
손탁호텔에는 영국수상 처칠도 묶었고 미국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이용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 호텔에 투숙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초청하여 회유하고 협박했다. 배일운동의 중심지가 을사늑약을 체결토록 하는 일제강점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손탁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 보에르에게 이 호텔을 매각했고, 보에르는 1917년에 이를 다시 이화학당에 매각했고, 이화학당은 이를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철거한 후 1923년에 이 자리에 ‘프라이 홀(Frey Hall)’을 신축했다. 그러나 ‘프라이 홀’마저 1975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로서는 과거 손탁호텔의 흔적마저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